초록

투명한 언어로 다가가는 몽환의 치명적 선택, 부정(不定)의 세계!

깨어나고 싶지 않은 모호하고 몽환적인 세계를 담아낸 강성은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죽음과 현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라 볼 수 있을까? 강성은 시인은 눈에 익은 동화적 장치를 ‘시’안에 상징이 아닌 비유를 통해 가져오면서 모호하면서도 한편으로 긴장감 있는 논리로 삶과 문명, 현실원식을 바라본다.

그녀의 비틀린 동화는 어둡고 기괴하여 종종 난해할 때도 있지만 낯선 상상력 속에 아련한 슬픔의 정서를 담고 있다. 때로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초현실적이며 부조리하기도 하고, 인과율이 파괴된 즉흥성과 기발함으로 가득한 시들이 펼쳐진다. 악몽 같은 동화와 환상 세계를 세련되고 유려한 리듬, 잘 짜인 어법으로 노래하는 그만의 시세계를 만나보자.

☞이 책에 담긴 시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붉은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시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 길들도 사라졌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시는 사이 계절은 바꾸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