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언어를 향한 집요한 탐구심으로 베일에 가려진 언어를 움켜쥐다!

언어를 향한 끝없는 탐구심과 성찰을 담아낸 채호기 시집 『손가락이 뜨겁다』. 등단 21년을 맞은 채호기 시인이 전작 「수련」 이후 7년 만에 펴낸 다섯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채호기 시인은 시적 언어를 사물의 재현을 통해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단지 재현만이 아니라 불가능할 것 같은 실재를 향한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이미 언어로 실재를 ''재현''하고 있는 모순된 상황에서 ''재현''을 넘어서 실재에 다가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불가능한 작업을, 부재하는 ''당신''과 수면 아래 놓인 ''돌''과 뜨거운 ''손가락''을 통해 보여준다. 또한 ''시적 언어''를 집요하게 천착하여 해석의 진경을 펼치는 채호기 시인은 몸을 빚어내는 우리의 실재를 통해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 책에 담긴 시

손가락이 뜨겁다

하늘의 별은 뜨겁다. 밤은 차갑다. 벌거벗은 네 등은 차갑다. 내 손은 뜨겁다. 비가 오고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내 손가락들이 수증기에 갇힌다. 물렁물렁해진 진흙에 발이 빠지듯 네 등을 산책하는 손가락들이 빠져든다. 네 등에 손톱 끝으로 고랑을 내며 글씨를 쓴다. 씨앗을 뿌린다.

흙이 글자를 끌어당긴다. 네 등에 묻힌 글자에서 싹이 돋고, 들꽃들이 피어났다. 밤은 뜨겁다. 꽃은 뜨겁다. 꽃의 향기는 시가 되어 손가락 끝에 만져진다.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영원히 새겨졌다. 별은 뜨겁다. 손가락도 뜨겁다.